2024 평창군수 심 재 국 < 2024 신년사 < 기사본문 강원신문 지방시대 글로벌 리더


1801년 조선 천주교회는 83종의 한글 서학(西學) 책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15, 16세기에는 한국 중세시기 가운데서 농민의 항쟁이 가장 덜 활발하였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민의 항쟁은 15세기 후반부터 점차 활발해져서 16세기 후반에는 꽤 격화되었다. 15세기 전반에는 명화적과 백정의 활동이 자주 기록에 나타난다.


한편, 조선에는 지역민들을 치료하고 약재를 처방한 유의(유학자이면서 의학 지식에 밝은 사람)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석간은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 영주에서 지역민을 치료하는데 여생을 바쳤습니다. 정조는 재난 상황에서 적극적인 복지 정책을 펼쳤고, 이와 더불어 정약용은 근본적으로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이처럼 조선은 역병을 예방하기 위해 의서 제작, 한글 번역, 약재 제공 등의 방안을 제시했고, 재난 대책과 예방 대책 연구를 지원했습니다. 『간이벽온방언해』 뒤에 숨어 있는 이러한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정대업(定大業), 여민락(與民樂), 치화평(致和平), 보태평(報太平) 등 새로운 악장가사가 창작되었는데, 이들은 기존 가요( 만전춘, 서경별곡 등)의 곡조를 바탕으로 창작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가사는 송순(宋純)에 이어 송강가사(松江歌辭)의 저자 정철(鄭澈)에 의해 대성되었다. 이와 아울러 조선 후기 문학에 나타난 큰 변화로는 한글 작품이 많이 쏟아져 나온 점을 들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한글 소설이 나오고 시조 등 한글 시가가 활발히 지어지면서 한글은 자리를 잡아가다가, 한말에 이르러 민족적 자각과 함께 국자로서 우리 문자 생활의 주도적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개인의 건강증진과 무병장수를 목적으로 도교적 양생법이 유행하였다.


그는 지난 5년간 조선 왕들과 ‘내밀한 대화’를 나눈 뒤 최근 『왕의 한의학』사이언스북스)이란 책을 펴냈다.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잡혀 갔다 돌아와 즉위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부산 오피 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부산op 등 패륜을 많이 부산 오피 저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부산오피 후기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금에 부산 오피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학문에 밝고 인품이 좋았으며, 세종의 뒤를 이어 유교적 이상 정치를 베풀고 문화를 발달
시켰음. 이 때 출판한 실록은 3부였으나,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 원본과 재출판시의 교정본(校正本)을 합하여 5부의 실록이 갖추어졌다.


중국에서 들어와 고려 때 이미 지배층의 전통이 된 뒤 조선으로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서민들은 이와 아울러 민요와 탈춤 등을 통해서 독자적인 정서를 응집하여 표출하고 있었다. 중세 신분질서의 모순 등을 담아 공동 제의에 이어 축제로서 공연되던 탈춤은 차츰 여러 지역에서 상업문화로 변모하였고, 나아가 판소리나 한글소설에도 서민적 정서가 담겨지게 되었다. 장시의 발달로 전보다 정보의 확산이 쉬워진 환경 속에서 일어난 이러한 변화는 민중의식을 고취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18세기는 15세기 이후 발달이 정체되었던 과학기술을 다시 부흥시키는 시기였다.


지방에서도 각 도의 관찰사가 그 도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겸하였다. 또 수령도 해당 고을의 병력을 지휘하는 무관직을 겸하고 있었다. 이조 전랑 자대제는 문반 당하관의 인사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관직자가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여 사실상 왕권에 대해 자율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하는 관행이었다.


이조 낭관과 삼사 관원들을 중심으로 질서를 갖추어 문신 당하관들이 당상관과 국왕에 대해 상당히 자율적으로 정치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한반도에 존재한 왕조 국가이다. 국왕의 밑에서 양반관료들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어 정치를 행하였다. 농업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자연경제체계가 강하였고, 양반 중심 세습신분제 사회였으나,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속에 신분제는 차츰 이완되어 갔다. 유교 문화의 위세가 계속 강해지는 가운데 서민과 여성들은 고유성을 강인하게 지켜 나갔다.


환국이 발생하기 시작한 숙종 때는 상품화폐경제가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신분제와 향촌주39 사회의 세력 판도에 변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환국은 이러한 커다란 사회 변동과도 관련을 맺으며 반복하여 일어났다. 천도가 마무리될 무렵 조선이 명에 보낸 표전주9을 놓고 두 나라 사이에 알력이 벌어지자, 조선의 주요 신료 사이에서 의견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이 전개된 까닭에 태조 재위 동안에는 국가의 통치기반을 확충할 수 없었을 뿐더러, 고려 멸망 때의 법과 제도도 부분적으로만 변혁할 수 있었다. 정치세력 또한 왕족의 교체를 제외하면 그렇게 크게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중국의 의서들을 통해 온역(온몸에서 열이 나는 역병) 치료법을 한글로 번역한 것인데요. 『간이벽온방언해』에서 ‘간이’란 ‘간편하다’, ‘벽온방’은 ‘온역을 물리치는 방법’을 뜻하는 것이죠. 중종은 백성을 살피는 마음을 담아 이 의학서와 약재를 전국에 배포했습니다. 정상기 함양문화원장은 "조선왕조 519년 기간에 우리 함양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중요한 사건 내용 등이 함양을 연구하고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특히 기녀(妓女)들이 입는 옷은 18세기에 이르면 겨드랑이 밑에까지 오게 되는데, 서민들도 이를 흉내 내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기녀들은 저고리 아래에 띠를 둘렀으나, 서민들은 그 띠를 마련하지 못해 젖가슴을 내놓는 일이 벌어지기 십상이었다. 관리, 군인, 승려, 광대, 장돌뱅이 등등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색이 있는 옷을 입었다. 18세기 이후 조선사회는 중세사회의 기본적인 틀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또 하나의 축인 신분제도는 특권 신분인 양반의 수가 점차 늘어가다가 18세기에 이르러서 일부 지역에서는 양반층의 비율이 반을 넘는, 비정상적인 양상이 전개되었다. 고려시대의 약재는 중국산을 들여다 썼으나, 고려 말기부터 국산 약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져서 1433년(세종 15)에는 이를 집대성한 『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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